본문 바로가기

잡학다식 꿀팁

(역사 공부) 아돌프 히틀러의 생애 간단 요약

반응형

학살자 아돌프 히틀러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희대의 악마 선동꾼으로 평가받고 있다.

 

1889년 독일 국경지역 오스트리아의 작은 촌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적 화가를 꿈꾸고

바그너 음악에 심취하는 등 예술에 관심이 작은 아이였다. 미술 대학에 진학했지만 특출 난 재능이 없어

예술에 대한 꿈은 포기 하고 만다.

 

히틀러의 청년시절 지역에 만연해 있던 반유대주의에 심취해 증오심을 키우게 되었는데 이것은

독일민족주의로서 극우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의 병역을 피하면서 1913년 독일 뮌헨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의 나이 25세 였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독일군에 자원 입대했다. 군인으로서 시작이었다. 이후 어린 시절 심취했던 사상으로 

반유대주의 정당에 입당하였는데 이 정당이 나치당의 전신이었다.

 

정치 활동을 시작한 그는 특유의 웅변능력으로 대중을 휘어잡게 된다.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위대한 독일혈통사상이 그 당시 대중의 니즈와 맞아떨어진다. 

 

1921년 그의 특출 난 사상웅변에 힘입어 나치당 수장으로 자리매김한다.

그 후 절대적 민족우월주의를 강조하고 유대인의 실질적 배척을 시작한다.

 

전 세계 대공황으로 독일 또한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이때 히틀러는  경제파탄의 원인을

유대인에게 돌림으로서 독일인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게 된다. 

1932년 정단선거에서 압승을 거둬 총리가 된 후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게 되는데 이는 대통령인

힌덴부르크의 권위를 무력화할 정도였다.

 

총리 자리에 오른 그는 반대파를 탄압하여 일당 독재체제를 만든다. 이후 힌덴부르크 태통령이 사망하자

독일의 절대 독재자의 자리에 오른다. (이때 무솔리니 파시즘의 모태 삼아 나치즘을 발전시킨다.)

 

절대 권력을 가진 히틀러는 독일의 패권 제패를 꿈꾼다. 1차 세계 대전당시 패전을 디딤돌 삼아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자존심과 국력을 되찾고자 했다. 2차 세계대전까지 경제의 일부 활성화의 덕분으로 

지지층 역시 더욱 극렬히 반응하였는데. 이들을 파시스트라 부른다. 

 

파시스트의 증오 선동과 히틀러의 자민족우월주의와 결합으로 인해 경제부흥의 걸림돌은 유대인이라 지목하게 된다.

이 결과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은 600만 명으로 추산될 정도였다. 또 유대인들로 하여금 독일인의 피가 오염된다란

초월적 민족주의를 선동한다.

 

이 학살 행위는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고 극우 나치즘과 파시즘을 경계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에 이르러 악마화의 정점이라 평가된다.

 

이 같은 선전선동은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2차 세계 대전은 전 세계를 통틀어 최악의 사상자가 발생됨을 물론

그 폐해는 전 세계에 전쟁의 경각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 초반부는 유럽 전체가 히틀러의 수중으로 떨어지는 듯했으나 영국, 미국 , 소련의 참전에 독일은 무너졌다.

당시 동맹국 이었던 일본은 독일의 무너짐으로 전쟁의 원동력을 잃게 된다.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에 생을 스스로 마감한 것으로 저 내진다.

 

(교훈) 독재의 발단은 역사적으로 그 위험성과 부작용이 검증되었다. 독재체제하에 국민들은 

늘 고통을 받았으며 이것은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해당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북한의 1당 독재만을 경계해야 할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도 독재자가 정권을 잡아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된 만큼 독재자의 발생을 큰 경계점 삼아야 한다.

현 시국에서 계엄령은 독재의 초석이 아닐까 한다.

 

반응형